감독: 켄 로치
개봉: 2016년
출연: 데이브 존스, 헤일리 스콰이어, 샤론 퍼시, 브리아나 샨, 딜런 맥키어넌
장르: 드라마
다니엘 블레이크는 흔한 노년의 이웃 아저씨다. 꽤 다혈질이지만 이웃을 챙길 줄 아는 속정 깊은 사람이었다. 목수인 다니엘은 얼마 전 급성 심장발작이 와 일하던 현장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다. 영화는 암전 상태에서 사회보험 관련 공무원과 다니엘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시작한다. 이런 암전은 갑갑한 영국 노동자, 혹은 하층민의 삶을 상징하는 듯 보였다.
갑갑한 이야기는 쳇바퀴 돌 듯 반복된다. 다니엘의 주치의는 휴직을 권고하고 고용연금은 취업이 가능한 상태이니 구직활동을 해야만 구직수당을 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질병수당 심사에서는 탈락해 상고를 해야 하지만 심사관의 전화가 걸려와 통보를 받은 후 해야 한다고 한다. 관료주의, 그리고 형식적 절차의 복잡함이 현실과의 괴리가 컸다. 게다가 거의 모든 것을 인터넷으로 처리하는 현실. 다니엘은 연필 세대라 항변하지만 소용이 없다.
이렇게 복지수당을 취급하는 사무실을 아무 소득 없이 드나들던 다니엘은 우연히 미혼모 케이티를 만나게 된다. 케이티는 런던에서 뉴캐슬로 이사해 복지수당 심사를 위해 들렀는데 버스를 잘못 타 늦는 바람에 제재대상이 되었다. 항의하는 케이티를 위해 항변하던 다니엘은 케이티와 함께 쫓겨난다.
케이티는 힘들지만 딸 데이지와 아들 딜런과 함께 열심히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젊은 미혼모였다. 나름의 계획이 있었지만 가난은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다. 이런 케이트를 보며 다니엘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성심껏 돕는다. 그러던 중 케이티는 마트에서 생리대를 훔치다 걸린 보안직원의 알선으로 매춘에 빠지게 된다. 이런 케이트를 보며 다니엘은 억장이 무너진다.
취업도 힘들고 수당은 받지 못한 다니엘의 상황도 나빠진다. 가재도구를 정리하고 다시 수당심사를 위해 사무실을 찾아간 다니엘은 그들의 허위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명단에서 이름을 빼고 질병수당 항고만 하겠다고 하고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는 거라며 자릴 차고 나와 버린다.
그리고 사무실 벽에 라커로 낙서를 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굶어 죽기 전에 항고일 배정을 요구한다.’ 지나던 동조자가 주택보조금 삭감한 장관과 민영화, 보수당을 비판한다. 하지만 이런 소소한 저항마저도 금세 다니엘이 경찰에 연행되면서 끝나버린다. 이후 다니엘은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
데이지가 찾아와 끈질긴 설득 끝에 문을 연 다니엘. 질병 수당 심사 항고일, 케이티와 함께 심사를 위해 함께 심사장으로 향한다. 복지사는 승소를 확신했다. 그러나 심사 전, 긴장한 다니엘은 화장실에서 쓰러져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그가 항고심에서 읽기 위해 써간 메모를 케이티가 다니엘의 장례식장에서 읽으며 영화는 끝난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난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이 영화는 현 자본주의 사회, 관료주의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를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이 처한 상황을 통해 담담히 보여준다. 장면은 담담하지만 보는 사람들의 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현실과 동떨어진 탁상행정, 관료들의 무책임한 태도는 영국도 우리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은가 보다.
켄 로치라는 거장의 영화로써는 무언가 밋밋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영국이 처한 현실임을 극사실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영화 그 이상의 여운을 남기는 영화가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아닌가 한다. 무료식료품 센터에 길게 늘어선 줄, 까다롭고 권위적인 공무원들과 하루하루가 살기 벅찬 하층민들의 삶. 과연 이것이 저 선진국의 상징 같은 영국의 현실인가,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적인 도시 런던의 화려함, 세계적인 금융허브, 세계적인 부자, 슈퍼스타가 많은 영국.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이렇게 묵묵하게 열심히 살아왔으나 사람, 시민으로서 최소한의 존엄, 생존도 보장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기 있노라, 라고 고발하는 영화였다.
다니엘이 계속해서 부딪치는 관료주의는 국가를 상징한다.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다니엘. 그는 이웃의 어려움을 도우며 연대하는 인정 많은 아저씨다. 그의 도움은 즉각적이고 사심이 없다. 그러나 국가는 타산을 따진다. 서류 몇 장, 전화 몇 통으로 한 인간의 존엄을 무시하고 굴종을 강요한다.
둘 중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다니엘일까, 영국일까? 내가 이민자로써 그런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다는 다니엘 블레이크를 선택하겠다. 그는 서류를 요구하지 않고 내게 작은 빵이나마 나눠줄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부당하게 존엄을 짓밟히고 있다면 옆에서 구시렁거리며 연대해줄 시민이기 때문이다.